의료사고 논의, 능동태에서 중동태로 바꿔야

  • 등록 2026.02.10 16: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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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 책임 논의 재구성한 연구 논문 발표
개인 처벌 중심의 책임 논의를 넘어 포용적 의료문화로의 전환 제안
중앙대병원 최상태 교수팀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까. 의료진 개인의 과실로 사건을 규정해 온 기존 책임 논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연구가 나왔다. 의료행위를 ‘누가 무엇을 했다’는 단선적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기존 방식이 의료사고의 본질과 의료문화를 동시에 왜곡해 왔다는 문제 제기다.


중앙대학교병원 류마티스내과 최상태 교수와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강철 객원교수는 최근 한국의료윤리학회에 의료사고와 책임 귀속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의료행위의 문법, 중동태: 중동태 정의와 포용적 의료문화로의 전환(The Grammar of Medical Practice and the Middle Voice: Toward Middle-Voice Justice and a More Inclusive Medical Culture)’ 이다.
 

 

  ▲ 최 상태 교수

 

이번 연구는 의료사고를 둘러싼 기존 논의가 능동과 피동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복잡한 의료 행위의 결과를 ‘가해자-피해자’ 구도로 단순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서술 방식은 의료행위가 지닌 복합성과 상호작용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의료사고의 구조적·시스템적 원인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의료행위는 의료진의 판단뿐 아니라 첨단 의료기기, 인공지능(AI), 의료기관의 운영 시스템, 환자의 기저질환과 예측 불가능한 생물학적 반응 등 다양한 요소가 맞물려 형성되는 동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기존 능동태 중심의 책임 논의는 이러한 복합 구조를 단일 행위자의 결과로 축소해 왔다고 분석했다.
 

가령 의료분쟁에서 ‘의사가 환자를 수술했다(능동태)’는 표현은 사건과 참여자를 기술하는 중립적인 형식이지만, 의료사고라는 사건에 적용될 경우 능동태의 ‘수술했다’는 표현이 행위자의 자발성과 의도를 부각시킨다. 이 상태에서 환자에게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면, 단순한 언어적 주어였던 의사는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의 주체’로 재해석되며, 발생한 손해는 그 행위의 산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 결과, 실제 의료사고의 원인이 환자 상태, 약물 특성, 의료시스템 등 복합적인 요인에 분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동태 서술은 ‘의사의 행위 → 환자의 손해’라는 책임 도식을 강화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최 교수는 ‘중동태(middle voice)’ 개념을 제시했다. 능동문에서 중동문으로 전환해야 인간 의사뿐 아니라 환경 요인들이 비선형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동문 구조의 서술 방식은 여러 요인이 얽혀 사건이 형성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약C는 효과적이고 흔히 처방되기 때문에, 의사B는 환자A에게 약C를 처방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의사B가 처방한 약C로 인해 환자A에게 사지마비가 발생하게 되었다’에서 보듯 의사의 처방이 환자의 사지마비를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더라도 중동문 구조는 결과의 원인을 하나의 요인으로 단순화시키기 보다 여러 내부, 외부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 즉 사건을 더 다층적이고 현실적이며 관계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다.

중동태를 단순한 문법 개념이 아니라 의료행위의 다중 행위자성과 상호관여성을 드러내는 분석 도구로 제안함으로써, 의료사고를 ‘관여와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개인 처벌 중심의 책임 논의를 넘어선 새로운 의료윤리적 책임 구성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최상태 교수는 “포용적인 의료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의료전문직과 법률전문직 모두에게 ‘중동태적 사건구조를 판단하는 역량’이 필요하다”며, “법률가는 의료사고를 단일 행위자의 결과로 환원하기 전에 사건을 형성한 조건과 상호작용을 다층적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인 역시 과실 입증 여부에만 반응하는 방어적 책임에서 벗어나, 의료행위의 본질에 부합하는 의료전문직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논문은 중동태적 판단과 서술이 필수의료 기피와 방어적 진료, 의료인의 소진 문제를 완화하고, 의료사고 이후 환자와 의료진 간의 신뢰 회복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연구에서 제시한 중동태적 접근은 단순한 문법 이론을 넘어 의료분쟁에서 책임의 방식과 의료문화의 방향을 재구성하는 규범적, 실천적 제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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