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성 희귀질환으로 죽음의 문턱에 놓여있던 23세 필리핀 청년이 한국 생체 간이식술의 힘을 받아 기적처럼 새 삶을 얻었다.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과거 총상으로 세 번의 복부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간 일부를 내주기로 결심했고, 11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가족들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서울아산병원 간이식팀(간이식·간담도외과 김기훈·안철수·김상훈 교수, 마취통증의학과 송준걸·권혜미 교수, 수술간호팀)은 지난달 18일(수) 필리핀 마카티병원에서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을 앓고 있는 프란츠 아렌 바바오 레예즈(Franz Aren Babao Reyes·남·23세)에게 어머니의 간 일부를 떼어내 이식하는 생체 간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마카티병원 개원 56년 이래 처음 이루어진 이번 생체 간이식 수술은 기증자와 환자 모두에게 고난도 수술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수술 후 순조로운 회복세를 보이며 최근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프란츠 아렌 바바오 레예즈 씨는 약 4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담도염을 앓아왔고 최근에는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만성적인 담관 염증으로 인해 간 기능이 저하되고 전신 상태도 나빠져 보존치료만으로는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울아산병원 간이식·간담도외과 안철수·김상훈 교수는 환자의 담관에 염증과 협착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병든 간과 간외 담관을 제거하고 새로운 간을 이식했다. 담관 재건은 담관-담관 문합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식한 간의 담관과 공장 문합을 통해 간이식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어머니 마리아 로레나 멘도자 바바오(Maria Lorena Mendoza Babao·50세) 씨는 과거 복부 총상으로 인한 장천공 수술로 세 차례의 복부 수술 병력이 있어 복강 내 심한 유착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서울아산병원 간이식·간담도외과 김기훈 교수는 현지 의료진과 함께 어머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복강경 수술 대신 개복 간절제술로 간 일부를 무사히 절제해냈다.
서울아산병원 간이식팀은 귀국 이후에도 마카티병원과 지속적으로 원격 회의를 진행하며 환자의 회복을 위해 적극 지원했다. 어머니는 수술 후 안정적인 경과를 보이며 수술 5일 만에 퇴원했으며, 아들 또한 건강하게 회복되어 이번 주 퇴원할 예정이다.
서울아산병원과 필리핀 마카티병원의 인연은 2023년 의학적 상호 교류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시작됐다.
필리핀은 간이식 생존율이 국제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며 다른 나라에 비해 간이식 수술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또한 장기 기증자 수가 인구 백만 명당 1명 수준으로 정체되어 있어 생체 간이식 전문 의료진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단 한 차례도 간이식 수술을 시행해본 적 없던 필리핀 마카티병원은 생체 간이식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서울아산병원에 의료진 교류, 교육 지원 등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고, 서울아산병원은 필리핀의 전반적인 의료 수준 향상을 위해 생체 간이식 전수를 결정했다.
서울아산병원은 2023년 필리핀 마카티병원 의료진 9명을 초청해 우수한 진료 및 수술 시스템을 경험하고 간이식 전 과정을 연수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2024년 10월 김기훈 교수가 필리핀 마카티병원의 ‘간담도 수술 및 간이식’ 세미나에 초청받아 직접 강연을 진행하며 간이식·간담도 분야에서 축적해 온 노하우를 전수했다.
프란츠 아렌 바바오 레예즈 씨는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서 간이식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희망이 생겼다. 멀리서 찾아와 저에게 새 생명을 선사한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했다.
김기훈 서울아산병원 간이식·간담도외과 교수는 “기증자인 어머니의 복부 수술 병력으로 인해 수술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으나 가족의 헌신에 의료진으로서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술에 임했다. 생명을 향한 모두의 마음이 모였고 마카티병원 의료진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덕분에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번 수술은 현지 의료진이 독자적으로 간이식을 시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데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 필리핀 마카티병원에 간이식 시스템이 잘 정착될 수 있도록 선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부족한 수술 장비를 지원할 예정이다. 마카티병원과의 협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필리핀에서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아산병원 간이식팀은 현재까지 생체 간이식만 7,563례를 시행했다. 지난 5월에는 뇌사자 간이식을 포함해 간이식 9,000례를 달성하며 단일 의료기관 기준 세계 최다 간이식 기록을 세웠다.
[사진 ](좌) 한국 의료진에게 생명을 선물 받은 프란츠 아렌 바바오 레예즈 씨가 ‘한국 의료 최고’라 외치며 두 손 모두 엄지를 치켜세운 사진을 전달해왔다. (우) 생체 간이식 수술을 받은 모자의 가족들이 한국 의료진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마카티병원에 찾아왔다. 왼쪽 두 번째가 김기훈 서울아산병원 간이식·간담도외과 교수.